미디어

진실 ≠ 진리

불곰맨발 2022. 8. 15. 11:23

영화 '관상'의 마지막 대사였다. '나는 파도만 보았을 뿐, 바람을 보지 못했다.' 사람 얼굴이라는 현상만 볼 줄 알았지, 변하는 시대를 읽지 못했다는 주인공의 통한의 한 마디가 큰 울림으로 남아 있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인 관상가, 이제 부서지는 파도가 아닌, 파도를 일으키는 보이지 않는 바람을 보려한다.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세상이 좋아진 덕분에 우리는 여러가지 미디어를 동원해 세상을 읽는다. 세상이 너무 좋아진 덕분에 우리는 세상을 직접 경험하는 일을 급격하게 줄여 왔다. 이제 아주 가까운 일상을 제외하면 모든 것은 검색엔진과 미디어 안에 있다. 심지어 검색엔진을 잘 이용하지도 않는다. 미디어가 떠먹이는 것을 받아먹는다. 

과거로 돌아가면 뭔가 더 나은 것인가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세상을 직접 경험하고 판단하는 피곤하고 위험한 일을 사람들은 어려워하고 무서워했다. 고대에나 현대에나 사람들은 '받아들여서 버틸 수 있을 만한 진리'를 믿었다. 과거의 진리는 비교적 간단했다. 

인간이 믿었던 것

아직도 종교에 의지하는 사람이 다수이긴 하지만, 종교의 교리가 예전만한 진리로서의 권위를 누리지는 못한다. 이것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 유교, 이슬람교 모두 마찬가지다.

오히려 현대의 진리는 미디어에 있다. 그리고 '현실'이라는 별명을 붙여서 '진리'가 '진실'로 비약한다. 애초에 논리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에 교리라는 이름으로 논리를 만들어 믿었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내가 믿는 '현실'에 해당하는 인간의 영역의 일을 특정한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물론 중간에 한 단계가 더 있었다. 우리가 20세기에 이데올로기라고 불렀던 그것, xx주의라는 이름들은 현대에 만들어낸 새로운 신이 었고, 다 실패했다.

20세기말 거대 언론 자본이 독점하던 미디어 '진실' 시장은, 개인 미디어 시대가 되면서 누구나 미디어 창작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진실은 타임라인에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유튜브에서,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보고 들은 것을 믿는다. 그렇게 우리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나만의 현실을 재창조한다. 그래서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 기사는 다 가짜뉴스고 기자는 기레기고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적어 올린다. 그것도 나이 먹을만큼 먹은 어른들이.언제부터인가 가짜뉴스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한 건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당신이 아는 진짜뉴스만 타임라인에서 보게 되면 새로운 가짜뉴스가 눈에 들어올거다. 가짜 뉴스는 수용자가 만들어 낸다. 사실 독자나 시청자에게 애초에 가짜인지 진짜인지 따질만한 가치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들의 판단의 개인의 의견일 뿐이다.

애초에 내 귀에 들어오는 말 중에 진실같은 건 없다. 불특정 다수의 대중은 나를 이용하기 위해 미디어를 생산한다. 나도 그렇게 한다. 상대적으로 나와 잘 맞는 필요한 정보가 있을 뿐이고, 자기가 판단해서 거기서 원하는 걸 얻는 건 개인의 몫이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정론' 같은 건 없다. '광고'가 있을 뿐이다. 온라인 개인 미디어가 생기면서 이 현상이 심화되긴 했지만, 그렇다고해서 과거의 언론사나 미디어 기업도 마찬가지로 업계의 같은 속성을 이용해왔다. 이렇게 미디어 자체를 의심하는 생각의 틀은 모든 게 사기고 거짓이라는 음모론과는 아주 거리가 먼, 의심하는 사고방식을 견지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대표적인 현상이 '정의의 타임라인'이다. 그들은 어떤 사건이나 정치 뉴스에 대해서 '정의'의 프레임에서 평론하기를 좋아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세상이 썩었다는 것이다. 양식 있는 시민, 진실을 알리는 기자, 의식있는 지식인임을 (자처하는 것도 아니고) 자의반 타의반 드러낸다. 마치 나는 원래 이런 얘기를 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처럼. 왜 그럴까? 세상이 그들과 상관없이 돌아갈 가능성이 높으니까. 유난히 학생과 교수 사회에 이런 사람들이 많은 것도 필연이다. 본인이 원하는대로 세상을 사는 건 얼마든지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치는 직종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이런 행동은 다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적어도 타임라인에서라도 정의를 구현하는 것은 자신의 믿음 체계를 만들어 내고, 내가 그래도 인간답게 살았다는 자기만족을 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일부 진실이 드러나기도 한다. 분명히 진실은 있다. 그들의 정의구현이 진리가 아닐 뿐이다. 증권사 뉴스 채널 말듣고 투자했다가 돈을 날렸다고 증권사 유튜브 채널 댓글창에 정의구현을 한다고 돈 잃은 투자자가 돈을 돌려받지는 못한다. 정치 채널말만 믿고 투표했다가 그 결과를 무를 수도 없다. (물론 애초에 나도 당신도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10살 때였다. 이발소에서 머리를 다듬고 이발소 아저씨가 나에게 소주 심부름을 시켰었다. 나는 별 생각없이 그의 말대로 술을 사러 쭐래쭐래 아래층 가게로 내려갔다가 나를 데리러 온 아버지와 마주쳤다. 상황을 들으신 아버님은 이발소를 뒤집어 놓으셨다. 집으로 돌아가서 나도 여러번 교육을 받았다. 아버님은 내게 한 글자씩 가르쳤다. '아저씨 나랑 맞술이라도 하자는 겁니까?' 나는 이 대사를 스무번쯤 반복숙달한 후에야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어느 분야에 대한 어떤 형식의 미디어 창작물이나 다 나를 어떤 식으로 움직이려는 시도다. 아버지의 조금 과격한 방식이 불편하긴 했어도 그날 나는 당신께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는지 감을 잡았다. 물론 그 뒤에도 난 무수히 많이 속긴 했어도. 내가 아는 지인들 중에도 당연히 그런길로 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조금만 더 심해지면 진정한 키보드 워리어로 재탄생할 사람들이고, 그렇게 누군가가 원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아직 깨닫지는 못했겠지만, 그들은 심부름을 하러 나선 것이다. 

조금씩 파악한 것들을 잘 이어맞추면 전체적인 진실을 파악할 수 있지 않느냐는 반론도 있다. 맞다. 다만 아주 제한적인 경우에 그렇다. 남이 뭐라고 하는 걸 듣기 전에 내가 뭘 해볼 시도는 했는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남이 알아낸 것에 대한 수용보다 비판적인 검토가 우선이고, 이건 그 누구에게 하는 말이 아닌 나 스스로가 먼저 해야하는 일이다. 

진실은 있다. 하지만 사람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진실을 진리로 둔갑시켜 믿어버리는 순간, 진리의 탈을 쓴 무언가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다. 

 
 
아직도 종교에 의지하는 사람이 다수이긴 하지만, 종교의 교리가 예전만한 진리로서의 권위를 누리지는 못한다. 이것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 유교, 이슬람교 모두 마찬가지다. 오히려 현대의 진리는 미디어에 있다. 그리고 '현실'이라는 별명을 붙여서 '진리'가 '진실'로 비약한다. 애초에 논리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에 교리라는 이름으로 논리를 만들어 믿었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내가 믿는 '현실'에 해당하는 인간의 영역의 일을 특정한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물론 중간에 한 단계가 더 있었다. 우리가 20세기에 이데올로기라고 불렀던 그것, xx주의라는 이름들은 현대에 만들어낸 새로운 신이 었고, 다 실패했다. 20세기말 거대 언론 자본이 독점하던 미디어 '진실' 시장은, 개인 미디어 시대가 되면서 누구나 미디어 창작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진실은 타임라인에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유튜브에서,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보고 들은 것을 믿는다. 그렇게 우리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나만의 현실을 재창조한다. 그래서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 기사는 다 가짜뉴스고 기자는 기레기고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적어 올린다. 그것도 나이 먹을만큼 먹은 어른들이.언제부터인가 가짜뉴스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한 건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당신이 아는 진짜뉴스만 타임라인에서 보게 되면 새로운 가짜뉴스가 눈에 들어올거다. 가짜 뉴스는 수용자가 만들어 낸다. 사실 독자나 시청자에게 애초에 가짜인지 진짜인지 따질만한 가치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들의 판단의 개인의 의견일 뿐이다. 애초에 내 귀에 들어오는 말 중에 진실같은 건 없다. 불특정 다수의 대중은 나를 이용하기 위해 미디어를 생산한다. 나도 그렇게 한다. 상대적으로 나와 잘 맞는 필요한 정보가 있을 뿐이고, 자기가 판단해서 거기서 원하는 걸 얻는 건 개인의 몫이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정론' 같은 건 없다. '광고'가 있을 뿐이다. 온라인 개인 미디어가 생기면서 이 현상이 심화되긴 했지만, 그렇다고해서 과거의 언론사나 미디어 기업도 마찬가지로 업계의 같은 속성을 이용해왔다. 이렇게 미디어 자체를 의심하는 생각의 틀은 모든 게 사기고 거짓이라는 음모론과는 아주 거리가 먼, 의심하는 사고방식을 견지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대표적인 현상이 '정의의 타임라인'이다. 그들은 어떤 사건이나 정치 뉴스에 대해서 '정의'의 프레임에서 평론하기를 좋아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세상이 썩었다는 것이다. 양식 있는 시민, 진실을 알리는 기자, 의식있는 지식인임을 (자처하는 것도 아니고) 자의반 타의반 드러낸다. 마치 나는 원래 이런 얘기를 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처럼. 왜 그럴까? 세상이 그들과 상관없이 돌아갈 가능성이 높으니까. 유난히 학생과 교수 사회에 이런 사람들이 많은 것도 필연이다. 본인이 원하는대로 세상을 사는 건 얼마든지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치는 직종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이런 행동은 다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적어도 타임라인에서라도 정의를 구현하는 것은 자신의 믿음 체계를 만들어 내고, 내가 그래도 인간답게 살았다는 자기만족을 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일부 진실이 드러나기도 한다. 분명히 진실은 있다. 그들의 정의구현이 진리가 아닐 뿐이다. 증권사 뉴스 채널 말듣고 투자했다가 돈을 날렸다고 증권사 유튜브 채널 댓글창에 정의구현을 한다고 돈 잃은 투자자가 돈을 돌려받지는 못한다. 10살 때였다. 이발소에서 머리를 다듬고 이발소 아저씨가 나에게 소주 심부름을 시켰었다. 나는 별 생각없이 그의 말대로 술을 사러 쭐래쭐래 아래층 가게로 내려갔다가 나를 데리러 온 아버지와 마주쳤다. 상황을 들으신 아버님은 이발소를 뒤집어 놓으셨다. 집으로 돌아가서 나도 여러번 교육을 받았다. 아버님은 내게 한 글자씩 가르쳤다. '아저씨 나랑 맞술이라도 하자는 겁니까?' 나는 이 대사를 스무번쯤 반복숙달한 후에야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기사는 정치든 주식이든 투자나 자기계발이든 그건 다 나를 어떤 식으로 움직이려는 거다. 아버지의 조금 과격한 방식이 불편하긴 했어도 그날 나는 당신께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는지 대충 감을 잡았딘. 그 뒤에도 무수히 많이 속았지만. 내가 아는 그 사람들은 그렇게 누군가가 원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심부름을 하러 나선 것이다. 물론 가위바위보를 하고 승부를 확인하기 전에 이 새끼가 왜 가위를 냈는지를 따지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