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 자본주의 3.0

불곰맨발 2022. 1. 23. 01:09

Full disclosure: 30대 후반까지, 막스 베버의 대표작인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내 평가는 박했다. 두 번 정도 읽었지만 숙독하지 않았고, 책을 제대로 읽고 내린 결정이라고 보기에 내 이해의 깊이는 별로 없었다. 오히려 대학원 진학을 결행한 내 입장에서 더 피부에 와닿았던 베버의 저작은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다. 베버가 겪은 독일식 강사와 교수사회에 대한 주제는 내가 곧 하게 될 생활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이 때가 2008년 금융위기 전후이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번에 이 책을 읽고 내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막스 베버, 김현욱 번역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신교의 칼뱅파가 주창한 '예정설'이 17-18세기 자본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는가이다. '예정설' 에 따르면 신과 신의 섭리에 인간은 아무런 권리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점이 없으며, 누가 구원을 받을 것인지는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져 있다. 신교와 구교를 막론하고 자기 구원에 대한 인간의 영향력을 120% 봉쇄한 경우는 없는데, 이로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구원 가능함을 스스로 믿으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하게 된다. 칼뱅파가 발전시킨 교리에 따르면 '금욕에 바탕을 둔 직업적 소명의식에 따라 부를 이루고, 그 부의 정상적인 기능을 위하여 자본을 순환시키는 것은 신의 섭리를 드러내는 일이 된다.'

예정설은 조급증을 만들어 낸다: 자기 확신에 대한 조급증. 예정설은 구원이 중요했던 당시 유럽인에게 두 가지 반응을 강요한다. 과도한, 때로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연결시키거나, 적어도 자신이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을 반증하기 위해서 더 청교도다운 삶을 살거나. 사람은 비교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정설의 논리가 구원에 대한 빠른 포기를 부를 것이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오히려 구원을 위하여 허용된 자본 축적의 결과를 낳는다. 청교도가 스스로 자문하는 것은 책을 읽고 나서 보건대 딱 두 가지다. 

 

1. 나는 돈을 벌만한 정당한 생산을 하고 있는가?

2. 그 돈은 돈 값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이윤은 정당하고 실질적인 생산 기여분에 대한 댓가이다. 허위 생산이나 비생산은 이윤을 뒷받침 해주지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벌린 돈은 한 번 자본이 된 이상, 모인 이후에도 항상 뭔가 생산적인 일에 쓰이고 있어야 한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예로 대표되는 시간에 대한 가치 부여와, 엄격한 금욕에 따른 몰입의 향상은 이를 잘 대변해준다. 바로 이 지점이 나의 마음을 바꾸었다. 자본 축적 목적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은 앞으로의 시대에 다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칼뱅파 청교도가 정착한 지역은 항상 권위에 저항하는 실질적 도시국가들이었다. 그리고 이런 도시들에는 항상 유태인도 있었다. 프랑스의 위그노가 부르봉 정권에 끝까지 저항했고, 네덜란드가 끝까지 스페인 독립전쟁을 치렀으며, 앤트워프-런던-뉴욕으로 이어지는 금융거래소의 지위가 칼뱅파 분포지역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다. 그런 곳들은 대개 여기저기 떠돌이들이 자유를 찾아 흘러들어온 도시들이었을 것이다. 

예전의 나는 이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발전이 있는 것이지, 그것이 반드시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막스 베버의 논증을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오해한 대표적인 사회과학의 결과물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생각은 지금도 일정 부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완전히 타협한 것은 아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간과했던 것은 청교도식 금욕이 만들어내는 몰입의 정도이다. 베버가 말하는 직업 윤리는 단순한 Job의 개념이 아니다. 노동을 의미하는 Work도 아니고 업무의 숙련도를 의미하는 Profession의 개념보다도 상위의 개념을 사용한다. '소명 (Calling)' 이 그것이다. 직업은 신의 부름이다. 이것이 청교도 도시민의 Laser-focus를 만들어 낸다. 금욕적 합리주의는 불필요한 비용을 삭제한다.


자본은 처음에 형성될 때, 자본가 스스로의 피로 태어나 점차 축적되어 나가면서 남의 피로 성장한다. '피 같은 돈', '피땀 어린 돈'이라는 표현에는 확실히 청교도적인 어떤 돈에 대한 태도가 반영되어 있는 듯하다. 이런 청교도적 자본주의자들에세 돈(혹은 자본)은 나와 남의 파와 눈물, 땀이라는 에너지가 담긴 것으로 함부로 쓰면 반드시 나를 해하는 물건이다. 혹시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예정설에 따라 구원받으르 사람이 신의 의지로 미리 정해져 있듯이, 돈도 다 쓰임새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베버의 설명에 따르면 그래서 칼뱅파 청교도들은 항상 부를 추구하면서도 지나치 부에 현혹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물론 재미있는 것은 지나친 부 자체를 마다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프로테스탄트의 윤리가 아니더라도 불필요한 지출과 배금주의를 경계하고 생성된 자본을 새로운 효용에 투자할 수 있는 2022년 이후의 세계에 걸맞는 정신적 강령을 상상해볼 수 있다. 이 기록문의 제목을 자본주의 3.0이라고 지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핵심은 종교가 아니라, 자본이 단순한 '풍족함'이나 '만족'으로 전환되지 않고 더 쓸모 있게 투자되도록 하는 마인드이다. 돈이 고여 썩지 않고 계속 유통되게 하는 것, 사실 돈 자체에는 그치가 없다. 그건 가격을 표시해서 흘러다닐 뿐이다. 이걸 찾아내는 것이 예전에는 기업에게 필요한 것이었다면 이제 점점 개인에게도 요구되는 상황으로 변하고 있다. 

베버가 마지막 페이지에 남긴 인용을 인용하고자 한다. 


"영혼이 없는 전문가, 감정이 없는 감각주의자. 이런 공허한 사람들은 일찍이 인류가 도달하지 못했던 단계에 다다랐다고 자만할 것이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장면은 아닌가.

임시 꼬리말: 이 독서기록은 2022년 1월 23일 서울대 고전 세미나를 앞두고 작성된 것으로, 원래의 의도와 다르게 하고 싶은 메세지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상태로 업로드 되었다. 베버는 학자로서 자기만의 엄밀성을 가지고 완성한 결과물이기 때문에, 독서를 기록하고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논리의 비약이 있거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는 일이 있는 것이 유난히 의식되는 책이었다. 세미나 이전에 블로그 작성을 목적으로 일단 출판하지만, 연관된 다른 책들을 읽어나가면서 잘못된 것은 계속적으로 바로잡아 나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