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의 개성상인을 처음 읽은 것은 아마 내가 중학생일 때였을 것이다.
당시 국민학교로 불렸던 곳의 선생들도 심심치 않게 '안토니오 꼬레아'라는 이름을 가끔 학생들에게 들먹이던 때가 있었다. 나는 흥미롭게 들었고, 다른 녀석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뭐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한복을 입은 남자라는 루벤스의 그림이 화제가 되었던 것은 굉장히 오래전의 일이다. 벌써 40년이나 된 일이고, 오세영의 이 역사소설이 배경으로 설정한 역사적 가설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거의 부정되었다. 이탈리아에 조선인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읽기에 따라서는 일종의 국뽕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이 책의 플롯으로 등장하는 비즈니스 케이스들은 현대적인 의미의 케이스 스터디가 되지는 못한다. 주인공들이 만들어내는 거래성과도 연속성이 없고, 상당히 운에 의존하는 것이 많아 평가적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소설이고, 소설은 독자의 마음속에 새롭게 이야기를 만든다.
이 책은 IMF가 발생하기 이전 한참 한국에서 슈퍼301조가 뉴스에 오르내리던 아직은 GATT 체제하의 한국에 발간되었다. 총 3권으로 처음 출시되었고, 당시 중학생이던 나는 이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이전 글에서 소개한 최생림 교수의 외환론을 도서관에서 찾아본 이유가 되는 책으로 객관적인 고전은 아니지만, 내게는 정신의 뿌리에 가까운 고전이다. 2010년경에 이 책을 다시 교보문고에서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이전의 3권들이 모두 헐어서 도저히 제본이 유지되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2권으로 개편된 전집을 한 번 더 사서 읽었다. 지금은 그 때 다시 산 책들마저 세월의 풍파를 겪었다. 1권은 없어졌고, 2권의 제본상태가 불량하다. 그만큼 내가 이 책을 많이 읽었다는 뜻이다. 집중해서 공부하듯이 읽은 것이 아니라, 그냥 심심하면 이 책을 펼쳐들곤 했다. 이 정도면 사실 책이 아니라 애착 인형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소설은 칠천량에서 시작한다. 임진왜란 칠천량 해전에 동원된 주인공 유승업은 왜군에 가족을 잃고, 패전 이후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포로가 된다. 일본에서 상당한 고초를 겪은 주인공은 기회가 닿아 일본에서 이탈리아인 카를레티의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이동, 이탈리아에 정착하여 상사원의 생활을 시작한다. 평행한 현대의 주인공 유명훈은 1987년 현재의 대한민국 상사의 부장이다. 두 주인공 모두 소설 마지막에는 이탈리아식의 안토니오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이 소설이 나에게 가르친 것은 무궁무진하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배웠다:
중학생인 내가 당시에 뉴스로만 보던 슈퍼301조가 어떤 의미의 미국법인지 알게 되었다. 통화선물시장과 환투기의 개념을 알게 되었고, 달러-원 환율 (우리나라에서 국제표준에는 맞지도 않는 원달라 환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월스트리트 저널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월스트리트가 어디인지를 찾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무역의 생기초도 맛을 보았다. 특히 환율을 고려한 손익분기점의 개념을 알 수 있었다. 환율에 따라 물건을 팔아도 손해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을 읽고 알았다. 무엇보다 상업에 회계가 기본이 된다는 사실을 이 때 처음 알았고, 초보적인 회계 용어인 원장(Ledger)과 대차대조표라는 말을 이 때 처음 배웠다. 무상증자와 유상증자의 차이도 이 책을 읽고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전국시대 이후의 일본에서 처음 고구마가 재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당시의 일본이 국내 변동환율제를 사용하는 체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사카의 통화와 에도의 금화가 서로 다른 통화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당시의 류구국(오키나와)가 당밀의 수출국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당시의 도자기는 현대의 최첨단 반도체와 같은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일본과 유럽에서 어떻게 조총이 만들어지고 거래되었는지 상상해볼 수 있었다.
생활사적인 부분도 알 수 있다. 염색에 사용되는 인디고 블루, 사프란, 카민에 대해서 알 수 있었고, 특히 붉은 색 염료인 카민이 신대륙산 연지벌레로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이 때 처음 알았다. 나중에 이 색깔에 대한 작은 지식들은 내 커리어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색좌표와 CIE 도표를 볼 때 나는 이 때 처음 알게된 염료들의 이름을 떠올린다. 그리고 염료와 안료가 다른 기능을 하는 서로 다른 물질이라는 사실도 공부하게 되었다. 베니스와 피렌체의 특산품인 유리에 대해서 알 수 있었고, 유리의 원료인 규사와 현대의 반도체 원료인 실리콘이 갖는 유사성을 생각하게 된다.
유럽 각국의 역사적인 포지션도 공부할 수 있었다. 교황청이 지닌 특수한 지위와 권위를 처음 상상해볼 수 있었고, '파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라틴어가 어떻게 공식 언어로 쓰였는지, 당시 유럽의 유태인 자본이 어떤 기능을 했는지 맛을 볼 수 있었다. 레판토 해전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나중에 공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메디치 가문의 등장은 후에 로마인 이야기를 제외한 시오노 나나미의 나머지 저작을 읽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는 이전 글에서 다룬 마키아밸리의 군주론도 포함한다. 오스만 투르크의 예니체리가 어떤 성격의 부대였는지, 세계사 시간에 배운 7선제후가 어떤 투표권을 가진 것인지, 트럼프 카드의 4개 문양이 서로 다른 유럽의 왕가를 상징한다는 것을 이 소설을 읽고 알 수 있었다. 대항해시대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잉글랜드가 어떻게 대서양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네이피어에 의해 고안된 로그가 어떻게 항해술과 천문학에 사용되었는지 알 수 있게 되었고, 수학적인 개념이 어떻게 실용적인 의미를 가지는지 그 연결고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탄생한 새로운 유럽이 어떤 유럽인지, 그 피맺힌 산고인 30년 전쟁이 어떤 전쟁이었는지 나중에 전쟁사를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고,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읽게 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주인공인 유명훈이 자동찬 산업으로 진출하는 에피소드에서 등장하는 걸프전 소재가 있다. 오세영 작가가 걸프전을 묘사한 함재기의 전투 장면이 아마도 영화 TopGun의 Dog Fighting 장면을 비슷하게 묘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막의 폭풍작전 (Desert Storm)을 뉴스에서 중계하는 것을 보았던 기억이 이 책을 읽을 때마다 다시 떠오른다. 상업과 무역, 투자의 세계에서 국제 정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이 책이 가르쳐주었다. 마이클 세일러의 인터뷰를 잘 보면, 그의 뒤에는 범선 모형이 있다. 나는 그가 왜 범선 모형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다.
이 소설은 나에게 많은 것을 처음으로 배울 기회와 계기를 마련했다. 어젯밤까지 나는 동료들과 2022년에 벌어질 수 있는 급격한 변화들의 시나리오를 검토했다. 이 글을 적는 2022년 오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준비하고 있이며 세계는 다시 한 번 변화의 소용돌이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 동안 나는 단순히 밥벌이를 하기 위해 너무 오랫동안 이 책에서 시작된 나의 끓는 피를 식히고 있었다. 지금의 직업을 가지게 된 것이 의미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너무 먼 길을 돌아왔다. 그건 너무 비싼 댓가였고, 나는 그 댓가를 치르고 있다.
다시 나의 시작을 부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보다 중요한 것 (feat. 메타버스 + 암호화폐 실전투자 바이블) (0) | 2022.03.05 |
---|---|
이어령은 시대의 지성이 아니다. (0) | 2022.03.01 |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 자본주의 3.0 (0) | 2022.01.23 |
The Bed of Procrustes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나심 탈레브) - 누가 이론에 삶을 끼워맞추는가 (2) | 2022.01.11 |
혁명노트 비판 - 혁명노트 (김규항) (0) | 2022.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