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노트 비판 - 혁명노트 (김규항)

불곰맨발 2022. 1. 3. 19:28

오랫동안 묵혀두었다가 쓰는 독서기록이다. 리뷰를 작성한 것은 벌써 1년반 전이고, 써두고 나서도 한참을 고민했다. 이 리뷰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이유는 뭘까.

김규항의 글은 간결하고 담백해서 대학생 시절부터 좋아했다. 이어령 스타일의, 뭔가 덕지덕지 붙이거나 있어보이는 척 하는 문체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쿨내'가 나는 글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내가 책 리뷰만 써봐도 글을 기름기 없이 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글을 쓰는 사람은 알고 있다. 힘이 있는 글과 말이 모여 담론이 되고, 그 담론이 커져서 여론이 되었을 때 가지게 되는 그 힘을. 김규항의 글은 과도하게 힘이 들어 갔을 때 생기는 기름기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B급 좌파'의 문체가 유난히 더 그랬었다.

'혁명노트'는 김규항의 블로그 글을 단순히 모은 것도 아니고, 이전 작인 '예수전' 처럼 소재와 등장인물이 정해져 있는 책도 아닌, 오랜만에 본인의 생각을 정리한 책이라 출시되자마자 바로 구입했다. 1판 2쇄의 날짜가 2020년 3월 9일, 기가 막힌 날짜다. 2020년 3월 19일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코스피 1400대를 찍기 전 팬데믹으로 '어어...' 하며 추락에 가속도를 붙이던 시기다. 나는 그 3월 분명히 공기의 굴절율이 바뀌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혁명노트를 단순히 사회주의 서적으로 구분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타이밍도 없었을 것이다.

혁명노트 (김규항, 2020)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제시하기 전에 19세기 자본주의를 정교하게 분석했다. (마르크스의 저작은 별도의 리뷰를 쓸 계획이다.) 혁명노트도 이와 닮았다.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를 정교하게 분석하고 있고, 지적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나도 대부분 동의한다. 문제는 아주 치명적인 부분이 동의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 생각을 말하기 전에 책 내용부터보자. 김규항은 몇 가지 중요한 용어를 사용한다.

먼저 노동을 워크 (Work)와 레이버 (Labour)로 구분하였다. 전자는 '스스로 기획하고 만들어 나가는 노동', 후자는 '시켜서 일하는 것'으로 자율과 타율을 구분하여 노예의 노동 (Poiesis, 먹고 살기 위한 노동) 과 자유민의 노동 (Praxis, 문제 해결을 위한 창조적 노동, 영어로 의사나 변호사의 일을 의미하는 Practice가 여기서 나왔다.)을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노동이 노동 시장에서 워크와 레이버의 구분없이 시장에서 가격을 후려쳐서 거래되면서 노동자가 계약을 통해 자발적인것처럼 보이는 형태로 피지배계급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99% 동의한다. 현대의 직장인이 이런 형태의 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규항의 이런 설명은 직장인이 왜 아침 일찍 출근해 하루를 도전적으로 받아들이며 회사의 일을 자기 일로 내면화하여 열심히 할 필요가 없는지를 잘 설명한다. 나에게 소유권이 없고 노동 가격의 협상력이 없는 상태에서 레이버를 워크처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스스로 기획하고 만들어 나가도 온전히 내 것이 안 되는 일을 레이버만큼의 가격으로 워크처럼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규항의 논리는 '물신성'을 논하면서 비약을 거친다.

'물신성' 이란 화폐 가치로 표현되는 재화의 가치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것으로 착각하여 생기는 '허구의 가치' 에 대한 과도한 믿음을 의미한다. (김규항은 마르크스가 도입한 용어로 소개하고 있다.) 책의 57절에 따르면, 상품에 부여된 가치가 본질적으로 노동으로부터 왔으나 그 노동의 결과물이 '교환' 되면서 마치 천부적으로 상품에 있다고 여겨지는 성질을 물신성이라 부른다. 독자인 내가 읽기에 물신성이란 가격과 가치를 완전 동일시하는데서 출발한다. '유용 노동의 본질적 가치' 가 '교환으로 인한 상품의 가치'로 치환된 것에서 물신성이 기인한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교환이라는 경제 행위가 들어갔기 때문에 여기서부터는 분명히 가격의 개념이 개입힌다.

63절에서 이런 내용을 저자는 상술하고 있다. 중요한 부분이라 원문을 인용한다.

"상품 물신성은 '화폐 물신성'으로 이어진다. 화폐에 익숙한 우리는 화폐를 원래 존재하는 자연물처럼 여긴다. 그러나 화폐는 엄연히 사회적으로 생겨났다. 상품의 가치가 노동에 있그 크기가 노동 시간이라면, 왜 상품의 가치는 '3시간짜리', '7시간짜리' 식으로 표현하지 않고 '5천원짜리', '10만원짜리' 하는 식의 화폐 형태로 표현할까? 자본주의에서 화폐는 단지 상품의 교환을 편리하게 하는 수단이 아니다. 상품의 가치는 교환을 통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 화폐는 바로 그 일을 담당한다....(중략)...화폐는 원래 금이다. 지폐는 '금 보관증' 같은 것이고....(중략)...그 이래로 지폐는 불환지폐, 즉 종잇조각일 뿐이다. 그러나 화폐 물신은 화폐가 가지는 사회적 속성이기화폐가 금인가 종잇조각인가와는 상관없이 나타난다.....(중략)...협동조합이나 공동체 운동의 역사에서는 자본주의의 문제가 화폐에 있다고 보고, 화폐를 '노동 증서' 같은 것으로 대체하는 방으로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이어져왔다. 이런 아이디어는 대체로 존중할 만한 의도에서 나왔지만, 화폐 물신성의 유서깊은 좌익 버전이기도 하다. 화폐 없는 자본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말은 화폐만 없애면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본주의를 둔 화폐만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자본주의하에서 화폐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면 그게 새로운 화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연준의 양적완화를 비난하는 자본주의자의 주장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다. 완전히 동의한다. 1971년 미국의 금 태환 정지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로버트 기요사키가 지적해오고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내가 한 '3시간짜리' 노동이 다른 사람에게 '3시간짜리' 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굳이 설명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와 김규항을 포함한 사회주의에서 제기한 문제는 결국 하나다. 상품의 가치가 교환을 통해 가격으로 정량화되는데, 노동은 어떻게 정량화할 것인가. 마르크스이래로 모든 좌파 진영에서의 문제제기는 노동의 정량화 문제에서 출발한다. 이후로 이어지는 정치와 이념의 문제는 경제학이 단순한 경제학의 문제가 아닌 정치경제학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김규항의 논지에서 동의가 안 되는 부분은 두 부분이다.

1. 자신의 노동이 워크로서 대접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노동자는 잉여노동을 거부하고 시장에서 (원칙적으로) 이탈할 수 있다. 물론 노동자에게 그럴만한 협상력이나 상황 인지, 의지가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있다. 하지만 자신의 노동을 온전히 소유하는 것을 사업이라고 할 때, 그 사업에는 위험(Risk)가 있다. 노동자는 잉여 노동을 제공하고 Risk를 회피한다. 노동의 할인율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개별 노동자가 판단할 일이다.

노동에 대해서 논하며 인간의 노동이 레이버이기보다 워크이기위해서 예술가의 노동을 예로 드는 경우가 많은데,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다. 사명감을 가지고 사업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의 노동이 레이버가 아닌 워크의 대표적인 예다. 예술가의 예술은 전달 가치가 모호하지만 창업자의 부가가치는 평가받고, 유용한 결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2. 노동의 가치가 절대적인 정량화가 어렵다는 점은 19세기 이후만의 문제가 아니다. 교환 가격의 편차는 이미 맹자가 지적한 적이 있는 문제다. 바닷가의 생선과 내륙지방의 생선 가격이 다를 수밖에 없듯이 관련된 노동의 가치도 다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상품의 소비는 감정적인 행위이고, 인간은 항상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소비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소위 김규항이 원하는 자본주의의 극복은 노동과 상품 가치의 경직화를 통하지 않고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혁명노트의 후반부에 저자도 그렇게 썼다. '현대의 생산력 수준은 이미 모든 사람들이 적당히 노동하며 자유롭고 창조적인 삶을 누리는 것이 가능하고, 인민을 위해서 이루어지고 생태차원에서 통제 되여야 한다.' 라고 말이다. 문제는 항상 적당히 노동하며 적당한 수준의 욕망으로 살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데 있다. 1. 남보다 잘 살려는 사람은 항상 있고, 2. 남보다 적게 일하려는 사람도 항상 있으며, 3. 생태차원에서 통제되어야 한다는게 무슨 뜻인지 모호하다.

'노예가 있는 한 나는 자유롭지 않다.'라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이 인용된 마지막 부분은 결국 모든 사람을 해방시켜야 자본주의의 극복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위에서 지적한 세 가지가 모두 가능하더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모두 해방시키는 것보다 내가 먼저 해당되는 것이 항상 빠르다. 빠른 해결책을 두고 돌아가려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김규항 작가의 마음은 알겠다. 안 될 것 같은 것도 한 걸음씩 시작하지 않으면 도달하지 못한다는 마음에 한 사람, 한 사람 조금씩 다른 생각을 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생은 유한하다. 인생을 걸고 인간 해방을 하는 것보다, 나의 경제적 자유를 얻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그것이 설령 자본주의하의 일차원적 자유라고 할지라도.

최근 김규항의 블로그에 올라온 글 중에 새로운 문명의 틀로 생태주의와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를 제시한 짧은 글이 있었다. 그 중 단 한 가지도 공감할 수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다. 욕심껏 살만한 사람들은 다 자기 맘대로 살아가는데, 왜 누구만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인가. '누구'에 자신을 대입할 사람도, 많다.

덧붙이는 말:
얼마 안 되는 독자중에 눈치가 빠른 이들은 노동의 정량화 말고 다른 것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김규항이 사회주의의 역사를 토대로 사용한 '노동 증서' 라는 말에 꽂히는 사람은 리뷰를 적고 있는 글쓴이 블로거와 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영어를 좀 써보겠다:

[노동 증서 = Proof of Work]


인용한 단락의 마지막 문장이 가슴을 뒤흔들어 놓는다. '자본주의하에서 화폐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면 그게 새로운 화폐의 역할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