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학위로는 부족하다 (피터 파이벨만) - 그나마 이 책이 나를 살렸다

불곰맨발 2022. 3. 7. 21:40

대학원에서 수여받는 학위의 무게는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진학하는 학생도 많지 않고, 학위를 받아도 그 효과는 과거에 비해 미미하다. 누군가 대학원을 갈 생각이라면 재고를 권하고 싶고, 특히나 학부 학위를 세탁하려는 생각으로 대학원을 진학하고자 한다면 말리고 싶다. 이젠 학위로 뭘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그래도 학위과정을 이미 시작했거나, 포부를 가지고 대학원 과정에 진학하고자 한다면 꼭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 있다. 

'박사학위로는 부족하다' 라는 네이비 색상에 붉은색으로 제목이 강조되었던 한국어판을 먼저 읽었다. 저자 파이벨만은 실제로 학위가 있는 연구자이고, 현직으로 Sandia Lab.에 근무중이다. "Feibelman, Peter J." 으로 구글 검색해보면 저자의 약력을 금방 알 수 있다. 

저자의 언어로 이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이 책은 생존에 대한 책이다. 석사,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서 대학원을 진학한 학생들이 그저 졸업만하면 어떻게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현실에 저자는 고개를 젓는다. 학위 자체로는 대학원생의 생존을 보장하지 않는다. 미안한 얘기지만, 문과생은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하드코어 이공계열 학위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당신의 생존은 험난하다. 

학생이 어떤 지도교수를 선택해야 하는지, 자신의 상황에 맞추어 학계가 어울리는지 아니면, 정부연구소나 회사가 어울리는지 냉철한 기준으로 판단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저자의 팁은 아주 실질적인 것이 많아서, 개인적으로 대학원생 시절 어떤 방식으로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지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 이 책을 읽었기 때문에, 나는 졸업하는데 8년이 넘게 걸릴 것 같은, 내가 좋아하고 관심을 가졌던 분야의 지도교수 연구실에 들어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었기 때문에, 내가 학계에 남기에는 성향이 맞지 않고, 회사로 취직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단순히 진학 지도 내용만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얇은 편이지만, 어떻게 효과적으로 논문을 작성할 수 있는지, 왜 노벨상 수상자를 지도교수로 고르는 것이 불리할 수 있는지, 언제쯤 결혼을 하는 것이 적절한지, 어떤 방식으로 연구제안서를 써야하는지까지도 가르친다. 연구소나 대학교의 교수직에 지원할 때 필요한 면접 인터뷰의 팁도 들어있다. 이 책에서는 학위를 수여받은 자로서 인생을 설계하는데 대학교수로서 테뉴어 (Tenure, 종신재직권)필요한 모든 기본적인 정보들이 다 들어있다. 왜 NSF (National Science Foundation)과 NIH (National Institute of Health) 같은 재단에서 연구비를 지원받는 것은 선망하면서도 DoD (Department of Defence)나 DARPA (Defence Advanced Research Program Agency)로부터 연구비 지원을 받는 것은 꺼리는 연구자들이 있는지, 그리고 생존을 위해서 왜 그런 선택적인 태도를 가지면 안 되는지, 저자는 아주 적나라한 설명을 한다. 그리고 이런 설명들은 단순히 팁을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주변에 찾아볼 수 있는 연구자들의 사례를 들어 어떤 선택이 더 나은 방법이었을지 분석하는 방식으로 제공된다. 

들어가는 말에 있는 것처럼, 대학원생에게 뭔가를 가르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생존의 지혜를 가르치는 사람은 없다. 이건 나도 경험했다. 박사학위를 받아보겠다고 인생을 투자했다가, 20-30대의 황금 같은 시간이 다 망가져도 학생의 인생을 책임지는 사람 같은 건 당연히 없다. 그런 현실 속에서 그나마 이 책이 나를 살렸다. 나는 훌륭한 연구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학위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포지션에 올 수 있을만큼 덜 바보스러운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지금 성공한 내 주변의 다른 교수들이나 연구자들을 보면, 내가 이 책을 읽고 현실에 적용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한다. (파이벨만 박사에게 감사를 표한다.)

대학원 지형도 많이 변했다. 이제 예전보다 세상은 더 빠르게 변화하기 때문에 박사학위가 기술과 사회의 변화를 따라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국에서 이공계 대학원으로 상당수의 학생을 공급하던 전문연구요원제도는 전면적으로 폐지되었다. 병력 자원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이제 탑 클래스의 대학원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서울과 수도권의 대학원에 인도, 동남아, 아랍계 학생들이 지도교수의 연구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우수한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군대를 빨리 다녀와 유학을 떠나고 있다. 학문에는 무한한 연구의 가능성이 있지만, 학위를 받은 자가 무조건 생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아주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개인적으로 내 자식들에게는 박사학위는 절대로 권하고 싶지 않다. 특히 국내 박사학위는.

이 책이 마치 대학원생만이 읽어야할 책처럼 보이지만, 사실 잘 들여다보면 어떤 식으로 나만의 비즈니스(연구)를 기획할 것인지, 특정 분야에서 어떻게 나만의 영역을 구축할 것인지에 대한 산 지식을 다루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연구자가 아님에도, 내가 하고자 하는 다른 비즈니스에서 이 책에서 배운 지식들을 적용하고 있다. 결국 사람이 살면서 어떤 분야에서 원하는 사업을 한다는 것은, 지혜로운 기획과 효과적인 실행의 결과이다. 두 가지 모두 이 책이 초보 연구자인 대학원생들에게 강력히 권하는 덕목이다. 그렇다고 대학원과 아주 관계가 없는 사람이 이 책을 읽는 것은 어렵겠지만, 뭔가 자신이 진학했던 분야가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이나, 대학 학부과정에서 길을 잃어 고민해 본 사람에게는 충분히 공감을 할 수 있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길 잃은 모든 학생에게 이 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