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리지(이중환) - 대한민국 부동산 투자 서적의 원형

불곰맨발 2022. 3. 29. 12:33

택리지는 대한민국 부동산 투자 서적의 원형이다. 최근에 출시된 수많은 부동산 투자 관련 서적은 택리지가 제시한 4가지 기준의 현대적인 해석에 기반한 것이다. 택리지는 단순히 지리 정보를 전달하는 책이 아니다. 지리, 생리, 산수, 인심이라는 네 가지 입지 선정 기준을 제시한 것이 이중환의 탁월한 점이다. 구체적인 입지 선정 기준을 조선시대에 책으로 출판한 것은 음양학의 성격이 강했던 풍수지리나 단순히 위치를 강조하는  "Location, location, location" 같은 서구의 실용적인 격언을 뛰어넘는다.

택리지, 한양출판, 1996

무려 1996년판을 가지고 있고, 아직도 이 책을 버리지 않고 있다. 제본이 위태롭기 때문에 곧 새 책을 구입해야겠지만, 표지에 있는 것처럼 한글세대를 위한 책으로 지명이나 고유명사 정도를 제외한 모든 텍스트가 1996년 당시에 한글로 잘 정리되어 나온 것이 마음에 들어 구입했다. 이 책은 충실한 한글 번역을 제공하면서도 한문 원문을 그대로 출판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택리지 이후에 나온 대한민국 문민정부 이후의 서적은 부동산 투자의 세부사항이나 제도 및 규제, 토지 공법이나 매매 기술, 혹은 전국적/지역적 수요와 공급 논리가 가미된 책들이다. 실질을 추구하기 위하여 이런 책들을 현장에서 익히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입지 선정의 논리 자체는 이중환이 제시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중환은 복거총론에서 지리, 생리, 인심, 산수라는 네 가지 기준을 설명하는데, 그 중에서도 '생리'를 다루것이 탁월한 점이다. (이것이 이중환을 실학자로 평가하는 근거가 된다. '지리'와 '산수'편은 현대적 입장에서는 덜 중요하다. 당시의 지리와 산수가 현대와 다르며, 일부 내용은 당대의 풍수학의 내용에 해당한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택리지를 폄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결국 이 나머지 두 편의 내용은 채광과 조망권, 생활휴식공간에 해당한다.) 생리는 무엇인가. 생리는 '먹고 사는 일'이다. 원문을 그대로 인용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입고 먹는 일에 종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위로는 조상과 부모를 봉양하고, 아래로는 처자와 노비를 길러야 하니,
재물을 경영하여 (살림을) 넓히지 않을 수가 없다."

 

이중환 당대에 먹고 사는 일을 논하는 것이 드문 일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 중요성을 당대의 사람들이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책으로 출판하는 일이 많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연스럽게 이중환은 조선시대의 경제적 토대 (마르크스가 말한 그 놈의 '하부 구조')에 대해 쓸 수밖에 없다. 이중환이 논하는 생리는 농업생산력과 수운의 편리성이다. 토지에서 생산된 물자가 강과 바다를 통한 조운 시스템을 통해 수도인 한성에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수운 체계에 기반하여 상업이 기능하게 된다. 농업국가였던 조선에서 자연스러운 일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택리지를 현대적인 관점에서 읽을 때 주의해야 한다. 이중환은 당시 조선의 현실에서 생리를 논했다. 현대의 독자는 2020년대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생리를 읽어야 한다. 현대적 관점에서 중요한 '생리'는 무엇인가. 일자리와 물류의 흐름, 철도와 도로 교통, 그리고 전력망과 인터넷 인프라다. 그럴 사람도 없겠지만, 택리지를 곧이곧대로 읽어봐야 쓸모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이중환이 택리지를 저술한 맥락 (Context)를 읽고 그 맥락을 현대적으로 활용해야 가치가 생긴다. 생리는 경제활동이고 직주근접과 생활편의성를 뜻한다. 길게 썼지만 당연한 이야기이고, 그래서 오히려 '팔도총론' 에 등장하는 평안도가 어떻고, 전라도가 어떻다는 식의 이중환의 주장은 현대에 맞지 않는다. 생리를 논하는 근거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수출 해운을 제외한 국내 해운의 의미가 퇴색했고, 9호선의 연장과 신안산선 개통, GTX와 SRT, 그리고 배달의 민족을 이용할 수 있는지 여부 같은 것이 중요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중환의 시대적 한계가 같은 지점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이중환은 사대부가 기거할 곳을 찾는 것을 기준으로 했을 뿐, 현대지리학의 관점이나 부동산 투자의 관점에서 입지를 논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중환이 논하는 '생리'의 산업 기반이 자본주의 사회의 규모의 경제와는 맞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뜬금없이 본인이 겪은 당쟁의 기원에 대해서 '인심' 편에서 길게 기술하는 것은, 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이 정치권력 획득을 통한 수조권 확보에 있기 때문이다. 이중환이 중앙정치에서 밀려나지 않았다면 기술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택리지의 한 부분이다. 이중환의 '인심'은 토지의 농업 생산력이 적당하면서도 군말 않고 세금을 잘 낼만한 평민이 많이 사는 땅을 고르는 기준이다. 그래야 사대부가 경제활동을 직접 챙기지 않아도 중앙정치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중환이 지적한 당쟁의 원인인 이조정랑 이슈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의 문제가 되었다. 조선의 경제적 기반이 얼마나 허약했는지 잘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소위 당시 사대부들은 권력을 잡지 않으면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삼남 지방 서원이 조선 후기까지 사대부의 근거가 되는 것은 삼남의 농업 생산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인심'편의 현대적 해석에 해당하는 입지 선정 요건은 바로 '학군'이다. 이중환은 '인심'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같은 당파의 사람끼리 모여살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야기한다. 이 당대의 현실에 대응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학군이다. 강남과 자립형사립고와 외국인 학교가 있는 서울/수도권 일부 및 송도와 제주가 주목받는 것은 비슷한 경제적 수준과 교육 수준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살게 되기 때문이다. 부동산 투자 서적에서 흔히 접하는 '초품아'를 찾는 이유 또한 같다. 수원 영통에서 왜 광교신도시가 아닌 분당으로 이동하는가. 자사고의 폐지가 왜 강남의 전세값을 자극하는가. 같은 영등포구 안에서도 여의도와 신길뉴타운과 대림동은 왜 다른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택리지를 현대적 관점에서 새겨 읽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덧붙이는 말:
지난 글에서 김시덕 작가의 '대서울의 길'을 다룬 적이 있지만, 부동산/토지/아파트/건축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책과 미디어의 리뷰를 작성할 계획이다. 이 글을 써내려가는 2022년 3월 29일 현재, 정권교체를 확정한 현 정권의 부동산 정책하에서 '부동산'은 일종의 금기어가 되었다. 하지만 그건 그렇게 정치적 혹은 정치공학적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