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

살 권리와 대접 받을 권리

불곰맨발 2022. 7. 9. 15:24

두 가지를 혼동한다. 살아갈 권리와 대접 받을 권리,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권리다. 이 혼동은 살만해졌다는 얘기다.

살 권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권리다. 죽음이 아닌 선택지밖에 없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니. 대접 받을 권리는 다르다. 인정받는 것에 대한 것이고, 인정받지 않아도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 상황 에 대한 이야기는 살 권리를 따지는 사람에게는 사치에 가깝게 느껴지는 것에 해당한다. 쓸모있는 것을 제공했늘 때 사람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그에 따른 권력을 얻는다.

정치적 올바름을 극단적으로 지향하는 사람들은 대접 받지 못하는 것이 생존을 위협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틀렸다. (다르다고 얘기하지 않았다. 그냥 틀렸다.) 생존의 문제와 사회적 인정에 수반되는 권력의 문제를 같다고 말한 것이니 틀린 것이다. 살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목숨을 부지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찍은 정치인이, 교육자가, 나의 스타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세상이 끝난 것처럼 구는 사람들, 저 배우의 저 모델의 몸매가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그 사람이나 직업을 부정하는 사람들, 한 성 정체성이 대접받지 못한다는 불평들과 내 집이 너무 싸거나 집 값이 미쳤다는 주장은 전부 대접받을 권리에서 나온 문제다. 그리고 대접의 여부는 시장에서 결정된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사람을 부정하는데에서 더 나아가 시장을 부정한다.

당신이 제공하는 가치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억울한가. 당신이 하는 일이나 서비스의 가격이 당신의 가치를 100% 대변하지는 않고 그 평가가 짜고 부당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그 평가 자체를 부정하는 순간, 다시는아무 것도 다른 사람에게 제안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러면 나는 배우거나 개선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운동으로 몸을 만들고 싶은 사람에게 그렇게 사람의 몸을 계량하는 태도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건 디테일에 집중라는 개인을 무시하는 발언이기 쉽다.

경쟁이, 투표가, 어떤 판결이, 시장이 늘 공정하고 옳다는 말을 하는게 아니다. 하지만 그 판을 떠나버리면 과거나 오지 않은 꿈같은 미래로 도망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무도 당신에게 당신이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지금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덜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결국 남는 것은 상황을 받아들이는 자의 감정이다. 부정적인 감점이 억울함이 되고 그게 스스로을 향하는 순간 판을 엎어버리고 싶은 감정. 나도 그 감정에 무수히 많이 져 왔다. 이제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