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살이 40년만에 지리가 주제인 좋은 책을 만났다.
주제를 지리라고 한정하는 것이 사실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김시덕 작가의 대서울의 길은 단순히 지리학과 입지에 제한된 주제를 다루는 책이 아니다. 책의 내용상 부동산 개발사에 대한 이야기가 다수 등장하고,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완전히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얼핏 보면 민감한 주제를 다루는 책인 것 같지만, 사실 부동산에 대한 책은 더더욱 아니다.
작가의 주장을 요약하면, 우리가 사는 공간은 면이 아니라 선이다. 우리가 지하철 역세권에 목숨을 걸고, 조금이라도 출퇴근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려는 이유는 도시의 발달이 관악구, 경기도 같은 면적으로 대표되는 행정구역이 아니라 9호선, SRT 같은 선을 타고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나트'에의 비유가 등장한다. 카나트란 고온 건조한 중동 지역에서 이용되는 지하 수로로 특정한 지역에서 물을 쓸 때에만 물이 위로 올라오는 구조를 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물이 솟는 곳에 취락이 형성되고 도시가 만들어진다. 작가는 우리의 생활도 이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직장과 집, 소비시설이라는 '물이 솟는' 곳을 연결하는 선위에서 우리의 살이가 만들어진다.
굳이 서울을 예로 들자면, 서울 동남부에 사난 사람과 서북부에 사는 사람은 전혀 다른 서울을 경험하면서 산다. 수색-상암-마포를 연결하는 지하철 6호선의 삶과 고속터미널-학동-청담을 연결하는 서울살이의 모습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서울을 말하면서 서울은 피자처럼 조각을 내어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쉽게 동의 할 수 있었다.
내비게이션이 처음 나오던 초창기에 내비 회사에서 지도를 일일히 따는 알바가 있었다는 얘기를 뒤늦게 들었을 때 그 알바를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할 정도로 지도 덕후에 속하는 나는 이사오고 나서 예전에 살던 동네를 방문하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이사를 많이 다녔고, 이사를 할 때마다 친구를 잃었다. 그리고 이사를 떠나고 나서 나 혼자 몰래 예전에 살던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익숙한 것들이 나타나면 묘한 기분이 드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흑석동과 은평구 갈현동을 신림동 구석구석을 하염없이 돌아다녔었다. 아직도 동작대교에서 한강 방면으로 나가서 갑자기 탁트인 한강 바람이 가슴을 뻥 뚫어 주는 느낌을 처음 받았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하고, 응암동 주택가를 돌면서 첫 여자친구의 기억을 해보는 것에 소소한 재미를 느낀다.
그렇게 완전히 다른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느끼는 것은 분명히 작가가 주장하는 것처럼 완전히 다른 문화권을 보는 느낌이다. 물론 외국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 이런 차이는 크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고, 그냥 Seoul, Korea라고 생각하겠지만 서울에 오래 산 사람으로서 서북부, 서남부, 동남부, 동북부, 그리고 용산과 광화문의 분위기는 각각 모두 다르다. 심지어 관악구 도림천을 경계로 신림2동과 신림9동의 분위기가 다르고, 같은 이태원이어도 이태원 대로변에서 북쪽이냐 남쪽이냐에 따라서 문화와 사람이 차이가 난다. 서로 다른 선을 따라 살기 때문이다. 지역에 따라 길이 다르고, 버스와 지하철의 노선이 다르고, 자주 이용하는 도로가 다르다.
실제로 지금 살고 있는 구로구에서 출발해서 자동차로 송도까지 생각보다 얼마 시간이 안걸리는데, 책에서는 서울 서남부에 사는 사람만 '경인' 이라는 용어를 피부로 이해한다고 주장했다. 서남부에 사는 나로서는 이 말은 정말 공감이 많이 가는 말이다. 예전에 성북구에 살던 시절에는 경인이라는 단어는 잊은 채 살 수 있었다. 생활권내에서 크게 의미가 있는 단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을 책만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김시덕 작가는 유튜브 채널 삼프로TV를 통해 '도시야사' 라는 재생목록 이름으로 책의 내용과 삽입된 사진들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책과 오디오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셈이다. 실제로 지역을 답사할 때 '선'을 이해하기 위해서 자동차로 이동하지 않고 실제로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현장을 찾아간다고 한다. 방송에서 했던 말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마지막가지 길이 남고, 길이 사라지면 역사가 사라진다.'는 말이었다.
대한민국은 엄청난 속도로 개발되어 왔고, 앞으로도 더 빠른 속도로 개발될 것 같다. 거기에 우리가 길을 계속 남겨 놓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3기신도시와 재개발 재건축, 교통 노선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당신이 어느 선 위에서 사는지를 한 번 생각해보고 싶은 이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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