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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학위로는 부족하다 (피터 파이벨만) - 그나마 이 책이 나를 살렸다

대학원에서 수여받는 학위의 무게는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진학하는 학생도 많지 않고, 학위를 받아도 그 효과는 과거에 비해 미미하다. 누군가 대학원을 갈 생각이라면 재고를 권하고 싶고, 특히나 학부 학위를 세탁하려는 생각으로 대학원을 진학하고자 한다면 말리고 싶다. 이젠 학위로 뭘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그래도 학위과정을 이미 시작했거나, 포부를 가지고 대학원 과정에 진학하고자 한다면 꼭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 있다. '박사학위로는 부족하다' 라는 네이비 색상에 붉은색으로 제목이 강조되었던 한국어판을 먼저 읽었다. 저자 파이벨만은 실제로 학위가 있는 연구자이고, 현직으로 Sandia Lab.에 근무중이다. "Feibelman, Peter J." 으로 구글 검색해보면 저자의 ..

2022.03.07

책보다 중요한 것 (feat. 메타버스 + 암호화폐 실전투자 바이블)

암호화폐와 메타버스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두 책을 읽었다. '메타버스'와 '암호화폐 실전 투자 바이블', 이 두 책은 각각의 책을 보면 좋은 책이나, 참고 정도면 하면 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사지 않았어도 되는 책들이다. 위의 두 책들은 모두 생소하고 새로 생긴 개념에 대한 틀을 잡기 위해 필요한 책들이긴 했다. 하지만, 메타버스를 이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디센트럴랜드나 제페토 서비스를 한 번이라도 직접 이용해보는 것이다. 암호화폐 실전투자 바이블의 책 내용은 기본적인 개념들이 잘 정리되어 있지만, 후반부에 나오는 트레이딩에 대한 내용들은 이미 주식 투자를 트레이더로서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것들이 많다. 직접 Crypto 트레이딩을 해보는 것이 학습하려는 내용을 효과적으로 배울..

2022.03.05

이어령은 시대의 지성이 아니다.

이어령이 시대의 지성이라는 말에 그냥 웃고 만다. 이어령을 비판할 마음은 없다. 그냥 비웃을 뿐이다. 한국을 해석하고 스스로의 정신세계를 책으로 늘어놓는 일에 시간을 정성스레 쏟은 사람인건 알겠다. 그리고 그런 저작물들은 주류 언론에서 팔아먹기 좋은 형태로 등장해서 대통령이나 정치인 따위에게 적당하게 편집되어 소비된다. 이건 전혀 문제 삼고 싶지 않다. 작가를 단순히 글을 파는 직업으로 환원해서 보면, 그는 성공적인 세일즈맨이다. '글을 판다' 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글쟁이가 글을 파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고, 이어령씨는 분명 성공했다. 그렇다고 해서 '시대의 지성' 까지 추어 올리는 일이 과연 필요한 일인가. 이어령을 시대의 지성으로 박제하는 것은 이어령의 저작을 이..

2022.03.01

베니스의 개성상인 (오세영) - 꿈의 시작이 된 역사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을 처음 읽은 것은 아마 내가 중학생일 때였을 것이다. 당시 국민학교로 불렸던 곳의 선생들도 심심치 않게 '안토니오 꼬레아'라는 이름을 가끔 학생들에게 들먹이던 때가 있었다. 나는 흥미롭게 들었고, 다른 녀석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뭐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한복을 입은 남자라는 루벤스의 그림이 화제가 되었던 것은 굉장히 오래전의 일이다. 벌써 40년이나 된 일이고, 오세영의 이 역사소설이 배경으로 설정한 역사적 가설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거의 부정되었다. 이탈리아에 조선인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읽기에 따라서는 일종의 국뽕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이 책의 플롯으로 등장하는 비즈니스 케이스들은 현대적인 의미의 케이스 스터디가 되지는 못한다. 주인공들이 만들어내는 거..

2022.01.31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 자본주의 3.0

Full disclosure: 30대 후반까지, 막스 베버의 대표작인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내 평가는 박했다. 두 번 정도 읽었지만 숙독하지 않았고, 책을 제대로 읽고 내린 결정이라고 보기에 내 이해의 깊이는 별로 없었다. 오히려 대학원 진학을 결행한 내 입장에서 더 피부에 와닿았던 베버의 저작은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다. 베버가 겪은 독일식 강사와 교수사회에 대한 주제는 내가 곧 하게 될 생활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이 때가 2008년 금융위기 전후이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번에 이 책을 읽고 내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신교의 칼뱅파가 주창한 '예정설'이 17-18세기 자본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는가이다. '예정..

2022.01.23

The Bed of Procrustes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나심 탈레브) - 누가 이론에 삶을 끼워맞추는가

나심 탈레브의 저작들은 201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지난 금융 위기를 예측한 것으로 여겨지는 블랙스완이 가장 유명하고 안티프래질이 잘 알려진 책이지만, 개인적으로 나심 탈레브의 정수는 이 책,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있다고 생각한다. 프로크루스테스는 고대 그리스의 도적이다. 아테네를 오가는 여행자들을 납치해서 저녁을 대접하고, 하룻밤 묵어가게 해놓고는 침대보다 키가 큰 사람은 다리나 머리를 잘라내고, 침대보다 키가 작은 사람은 침대 길이만큼 몸을 '잡아늘려' 침대에 맞추어 해쳤다. 나심 탈레브도 책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지만 '프로크루스테스' 라는 이름은 영어로 'Stretcher', 잡아 늘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제목에 이 책의 모든 정수가 숨어 있다. 키포인트에서는 글의 말미..

2022.01.11

혁명노트 비판 - 혁명노트 (김규항)

오랫동안 묵혀두었다가 쓰는 독서기록이다. 리뷰를 작성한 것은 벌써 1년반 전이고, 써두고 나서도 한참을 고민했다. 이 리뷰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이유는 뭘까. 김규항의 글은 간결하고 담백해서 대학생 시절부터 좋아했다. 이어령 스타일의, 뭔가 덕지덕지 붙이거나 있어보이는 척 하는 문체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쿨내'가 나는 글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내가 책 리뷰만 써봐도 글을 기름기 없이 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글을 쓰는 사람은 알고 있다. 힘이 있는 글과 말이 모여 담론이 되고, 그 담론이 커져서 여론이 되었을 때 가지게 되는 그 힘을. 김규항의 글은 과도하게 힘이 들어 갔을 때 생기는 기름기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B급 좌파'의 문체가 유난히 더 그랬었다. '혁명노트'는 ..

2022.01.03

군주론 (마키아밸리) - 어떤 리더십과 지배구조가 필요한가

군주론에 대한 '마키아밸리즘' 이라는 부정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잊는 것이 좋다. 군주론은 리더십과 조직의 지배구조, 조직 문화에 대한 책이고, 이런 주제에 대한 책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할 정도로 독자의 상황이 한가하지는 않다. 마키아밸리의 이 저작은 길지 않다. 서점에 가면 포켓판으로 3천원대에도 살 수 있는 이 책은 길지 않기 떄문에 그 밀도가 배가되는 책이다. 마키아밸리는 공무원이었다.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는 피렌체 공화국의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도대체 피렌체의 정체가 뭐가 문제가 있길래 맨날 얻어 터지고 사는가에 대한 답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이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두 번째 이유고, 정작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책을 당시 피렌체의 실권자가된 로렌조 디 메디치에게 보여주고 구직활동을..

2021.12.27

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 - 한국인은 준비가 되어 있는가

국화와 칼이 출간된 것은 벌써 70년도 넘었다. 책에 대한 리뷰를 쓰기 전에 미리 선언할 것은 선언해두고 가는 것이 좋겠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리뷰를 쓰는 나는 그 흔한 일본 여행을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 학부 시절에 수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이유로 여행을 등한시 했던 것을 매우 후회하고 있다. 일본을 한 번도 가보기 않은 사람이 한국의 일반적인 국민정서와 책에만 의존해서 일본이나 일본문화를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는 글을 쓰는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점에 국화와 칼을 읽을 이유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다. 곧 충돌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나 스스로를 규정하고 어떤 판단을 내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좋으..

2021.12.18

대서울의 길 (김시덕)

서울살이 40년만에 지리가 주제인 좋은 책을 만났다. 주제를 지리라고 한정하는 것이 사실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김시덕 작가의 대서울의 길은 단순히 지리학과 입지에 제한된 주제를 다루는 책이 아니다. 책의 내용상 부동산 개발사에 대한 이야기가 다수 등장하고,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완전히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얼핏 보면 민감한 주제를 다루는 책인 것 같지만, 사실 부동산에 대한 책은 더더욱 아니다. 작가의 주장을 요약하면, 우리가 사는 공간은 면이 아니라 선이다. 우리가 지하철 역세권에 목숨을 걸고, 조금이라도 출퇴근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려는 이유는 도시의 발달이 관악구, 경기도 같은 면적으로 대표되는 행정구역이 아니라 9호선, SRT 같은 선을 타고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나트'에의 ..

2021.12.06